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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위치한 노르웨이왕국은 약 38.5만 평방킬로미터의 면적에 5백 10만여명의 국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스웨덴과는 동쪽으로 1,619 킬로미터에 달하는 국경선을 공유하며, 최북단에는 핀란드와 러시아, 최남단에는 덴마크로 통하는 스카게라크 해협과 맞닿아 있다. 아래위로 길쭉한 형태 덕분에 서쪽으로 북대서양을 마주한 긴 해안선을 자랑한다.
노르웨이의 남서쪽 지역은 동남쪽 지역보다 기후가 온후하며 강수량도 많다. 위도가 높은 탓에 계절과 지역에 따라 백야 현상이 심하게 나타난다. 최북단의 경우 5월 말부터 7월 말까지 해가 전혀 지지 않는다.
노르웨이의 자연환경은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특히 서쪽 해안선과 북부 해안선이 아름답다. 곳곳에 펼쳐진 피오르드(fjord) 역시 유명해서, 매년 여름이 되면 전세계로부터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공식 언어인 노르웨이어는 보크몰(Bokmål)과 뉘노스크(Nynorsk) 두 갈래로 나뉘며 지역별 사투리도 많지만, 대부분의 경우 서로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스칸디나비아 원주민인 사미족의 고유 언어 역시 소수언어로서 어느 정도의 권리를 보장 받고 있다. 대부분의 노르웨이인들은 비교적 유창한 영어를 구사할 수 있으며,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제 3의 언어로 학습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 노르딕 국가들처럼 노르웨이의 국기 역시 왼쪽으로 치우친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다.
역사
노르웨이의 바이킹 문명은 872년, 하랄 1세에 의해 최초로 통일 되었다.
그의 폭정에 못이긴 노르웨이인들이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 그린란드, 영국, 아일랜드로 다수 이주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기독교도인 왕의 등장으로 북유럽 토속신앙은 10-11세기 정도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 당시 노르웨이의 통치 체계는 봉건주의의 성격을 띠었는데, 한자동맹은 국왕들이 지고 있는 거액의 빚을 빌미로 경제활동과 무역에 대한 권리를 크게 이양할 것을 요구했으며, 이는 국민들(특히 소작농들)의 부담으로 이어진다. 이 착취적인 관계는 아이러니하게도 흑사병으로 인해 농민 인구가 크게 감소했을 때 비로소 완화될 수 있었다.
14세기 말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은 ‘칼마르동맹’을 통해 연합국가가 되는데, 스웨덴은 오래지 않아 구스타브 바사(1496-1560)의 주도로 동맹에서 이탈한다. 노르웨이 역시 그 뒤를 따르려 했으나, 덴마크의 저지로 1814년까지 총 436년간 덴마크의 동맹국으로 남게 된다. 이 기간을 후대 노르웨이인들은 ‘400년의 밤’이라 불렀는데 행정, 문화, 심지어 왕권까지 전부 코펜하겐이 주물렀던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 동안 노르웨이는 크게 발전했다. 덴마크는 노르웨이에 식자재를, 노르웨이는 덴마크에 광물과 목재를 제공했으며 노르웨이는 흑사병의 악몽을 딛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1814년, 패전의 결과로 덴마크는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양도하게 된다. 노르웨이는 그 틈을 타 독립을 선언했으며, 이는 노르웨이-스웨덴 전쟁 발발의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스웨덴의 군사력 부족과 노르웨이의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오래지 않아 휴전을 선언하게 된다. 노르웨이 국왕은 왕위를 스웨덴에게 이양했는데, 이는 노르웨이가 독립적인 헌법과 기관들을 유지하되 외교는 스웨덴이 도맡아 하게 됨을 의미했다. 이러한 형태의 동맹은 1905년까지 유지되었다.
제1차 / 2차 세계대전 동안 노르웨이는 중립을 유지했다. 제 2차 세계대전 때는 총 5년간 나치 독일에게 점령 당하기도 했으나 이에 따른 피해는 크지 않았다.
노르웨이 국민들은 두 번에 걸친 국민투표를 통해 EU (유럽연합) 가입을 거부했으며, 지금도 노르웨이는 EU 비회원국으로 남아 있다.
VisitOSLO/Gunnar Strøm
문화
노르웨이의 문학가로는 희곡 <인형의 집>을 집필한 헨리크 입센이 가장 유명하다(오슬로에는 헨리크 입센의 이름을 딴 길이 있고, 한쪽에는 노르웨이 국립도서관이 자리잡고 있다). 20세기 들어서는 독립운동가 비에른 스티에르네 비에른손(1903)을 필두로 노르웨이의 도스토예프스키라 불리는 크누트 함순(1920), 사회와 여성 문제를 폭넓게 다룬 시그리드 운세트(1928)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스웨덴에서 수상자가 선정되고 수상식이 열리는 여타 노벨상들과는 달리, 창시자 알프레드 노벨은 평화상만은 노르웨이가 수여하도록 했다. 현재까지 총 두 명의 노르웨이인들이 평화상을 수상했다.
국제적으로 가장 큰 명성을 얻은 노르웨이인 화가는 인상주의와 상징주의의 거장 에드바르 뭉크(1863~1944)일 것이다. 뭉크는 <절규> 연작과 <마돈나> 등의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뭉크가 생애 대부분을 보낸 수도 오슬로의 뭉크박물관에서는 이들 중 절반 이상을 전시하고 있다. 뭉크의 <절규> 연작 중 한 점은 한때 세상에서 가장 비싸게 거래된 그림으로 이름을 알렸으나 현재는 세잔, 클림트, 고흐의 작품이 더 높은 가격에 낙찰됨으로 인해 8위를 유지하고 있다. 아름다운 자연의 영향으로 풍경화도 유명한 편인데, 요한 크리스티안 달의 작품들이 특히 잘 알려져 있다. 달의 작품은 오슬로의 국립미술관에서 다수 전시 중이다.
노르웨이의 음식문화는 오랜 어업 전통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신선한 연어, 청어, 대구, 송어 등의 어패류를 많이 소비한다. 이외에는 다른 북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밀과 감자가 주를 이룬다. 스웨덴어 ‘스모르가스보드’로 알려진 뷔페식 샌드위치 역시 유명하다. 차가운 재료를 여러 가지 준비해 원하는 종류의 빵 위로 자유롭게 올려 먹는 것으로, 노르웨이 내에서는 koldtbord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헨리크 입센, 에드바르 뭉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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